LLM을 받아들이기까지
읽는데 1분
LLM, 생각
나는 LLM을 꽤 오래 거부했다.
절대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초기에 나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LLM은 절대 사람이 작성한 코드를 이길 수 없다.' 사실 지금도 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정 영역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맥락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설계 판단, 비즈니스 도메인에 대한 직관, 코드 한 줄이 가져올 파급효과에 대한 감각 — 이런 것들은 아직 사람의 영역이다.
문제는 그 "특정 영역"이 생각보다 좁았다는 것이다. 내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규정했던 것들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는 충분한 컨텍스트만 주어지면 LLM도 꽤 잘 해내는 일이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완벽할 필요도 없다. 80점짜리 결과를 5분 만에 내놓고, 나머지 20점은 사람이 채우면 되니까.
내 강점이라고 믿었던 것
나는 스스로의 강점을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었다. 첫째, 빠른 시간 안에 어느 정도의 퀄리티가 보장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둘째, 넓은 도메인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에 동원할 수 있는 아이디어 풀이 넓다는 것.
둘 다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이 두 가지 덕분에 팀 안에서 역할을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능 개발이 필요하면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었고, 장애가 나면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으로 원인을 좁혀나갔다. 리뷰에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피드백을 줄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나라는 개발자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LLM이 업무 깊숙이 들어온 시점에서, 이 강점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빠르게 코드를 작성하는 것도, 다양한 접근법을 떠올리는 것도, 이제는 프롬프트 몇 줄이면 가능하다. 내가 몇 년에 걸쳐 쌓아온 것을 도구 하나가 평준화시켜 버린 셈이다.
더 불편했던 것은 이 현실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 '내가 쌓아온 것들이 의미 없는 건 아니잖아'라는 생각과,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잖아'라는 생각이 계속 충돌했다.
다시 질문을 던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LLM의 결과가 정말 믿을만 한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이 질문은 반은 순수한 궁금증이었고 반은 방어기제였다.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내 입지가 유지되니까. 실제로 초기에는 그런 근거를 찾기도 했다. 할루시네이션, 존재하지 않는 API를 자신 있게 제안하는 모습, 전체 맥락을 놓치고 부분만 맞추는 답변. 이런 사례를 모아서 '봐라, 아직 멀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여러 동료가 LLM을 활용해서 확실한 결과를 내놓고 있었다. 누군가는 반복적인 마이그레이션 작업을 몇 시간 만에 끝냈고, 누군가는 복잡한 쿼리 최적화에 LLM을 보조 도구로 활용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의심해도 눈앞에 있는 결과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의 퀄리티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것도.
FOMO도 한몫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내가 잘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을 바꾸는 것 사이에는 꽤 깊은 골이 있다.
자가당착, 그리고 결과
한편으로는 자가당착에도 빠졌다. LLM을 거부하면서도 호기심은 있었고, 쓰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몰래 시도해보고 있었다. 회의 시간에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면서, 퇴근 후에는 개인 프로젝트에서 조용히 써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꽤 우스운 모습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결과는 솔직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LLM을 업무에 도입해봤는데, 기존 내 생산성의 몇 배에 달하는 결과가 나왔다. 보일러플레이트 코드 작성, 테스트 케이스 생성, 문서화, 코드 리뷰 초안 — 이런 작업들에서 체감 효율이 확 달라졌다. 내가 직접 하면 30분 걸리던 일이 5분이면 끝나고, 남은 25분으로 더 중요한 설계나 검증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만능은 아니다. LLM이 내놓는 결과를 그대로 쓸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은 수정이 필요하고, 가끔은 처음부터 다시 작성하는 게 나을 때도 있다. 하지만 '시작점을 빠르게 만들어준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가치다. 빈 에디터를 바라보며 첫 줄을 고민하는 시간이 사라진다.
지금은 회사 계정의 토큰 quota가 부족해서 개인 계정까지 구독해서 쓰고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필요 없다고 잘라 말하던 도구에 자비를 쓰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란 게 참 허술하다.
무서운 건 변화가 아니다
변화가 무섭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돌아보면 진짜 무서운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니었다.
능력이 부족해서 뒤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영역은 존재한다. 그건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는 뜻이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상황이 변하길 바라는 태도 — 그것이 제일 큰 문제다. 변화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결국 아무 일도 못하는 것과 같다.
가끔 주변에서 "LLM 때문에 개발자가 필요 없어진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구가 바뀌었을 뿐,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 사람이 새로운 도구를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을 뿐이다. 연장통에 새 도구가 하나 추가된 것이지, 목수라는 직업이 사라진 게 아니다.
나는 늦었지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